점일이구 우두불출

황진이 뒤모습

황진이는 조선 전기의 기생이자 시인이다.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남긴 유명한 ‘點一二口 牛頭不出(점일이구 우두불출)’

이는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질문을) 맞추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준다”며 던진 일종의 퀴즈다.

點一二口(점일이구)는 글자 그대로
•( 점), -(일), =(이) , ㅁ(구)  네 개의 글자로 구성된 사자성어다.
그러면 형성되는 글자는 무엇일까? 바로 말씀 언(言) 자다.

牛頭不出(우두불출) 이란 소머리에 뿔이 없다는 뜻이다.
牛(우) 즉, 소에서 머리(뿔)를 떼어 버리면
단순한 소 우( 午) 자가 되는 것이다. 그냥 소 우 자라고 하지 않고 소에서 뿔을 떼니 단순한 소가 된다는 표현이 정말 기발하다.

이 두 글자, 말씀 언( 言) 자와 소 우(午)
자를 합치니, 그때서야 황진이의 본심이 노출된다.
다름 아닌 허락할 ‘허(許) 자’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결국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을 이렇게 사행시 암호(?), 허락할 허(許)로 전한 것이다.
이 글자를 해역 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자신을 송두리 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황진이의 기발한 사랑 찾기가 절묘 를 떠나 신박하다.

황진이는 뛰어난 시적 재능으로 여러 걸작 시와 시조들을 남겼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라는 시조라든지
<동짓달 기나긴 밤을> … 같은 시조들은  유명한 나머지,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있고 수능에도 출제된 바가 있다.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박연 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로도 유명하다.

서경덕과의 일화, 그리고 백호 임제가 황진이의 묘를 보고 시조를 읊었다는 등의 이야기로 보면 조선중기 중종 시기의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식백과에서는 “서경덕은 이른바 처사(處士)의 길,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하는 선비의 길로 일관했다”라고 전한다.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춘 사람)의 길 중에서 내성의 길에만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경덕이 벼슬길에 나아가 역사와 현실에 참여하는 출(出)의 길이 아니라 뜻과 마음을 온전히 지키면서 은일(隱逸)에 머무는 처(處)의 길을 걸었던 것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도 영향을 미쳤지 않나 싶다.

그러한 서경덕을 황진이는 왜 사모했을 까?
황진이가 문학적 능력과 교양을 갖춘 범상치 않은 기생이었으며, 또한 서경덕이 도가적 성향까지 보이며 권력과 명예, 재물과는 거리가 먼 비주류 방외지사(方外之士)의 삶을 살았기에 이 두 부분이 겹쳐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러한 몇몇 요소들이 서경덕과 황진이에 관한 심오한 ‘이야기’를 낳고 또 점점 더 굳어지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황진이의 그 유명한 시조 한 수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립해 보자.
“청산리벽계수(靑山裏碧溪水)야
수이감(水易感)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여기서 “청산리벽계수(靑山裏碧溪水)”란 황진이가 서화담 선생을 격조 있게 부른 별칭이다.
기개 있는 청렴한 선비 서화담을 “푸른 산속에 흐르는 맑은 계곡수”로 비유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이감(水易感)은 물이 잘 흐르는 것을 말하므로 “청산리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의 의미는, “화담선생님! 선비의 기개는 높으시지만 그것이 자랑만은 아닙니다!” 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도창해(一到滄海)는 “단숨에 넓은 바다에 도달한다”는 뜻인지라, 계곡 물이 바다에 이르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지만 ”늙어지면 다시 청춘을 찾을 수 없어요!” 하는 깊고 애달픈 비유가 담긴 말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명월이 만공산(滿空山) 할 때”, (“밝은 달빛이 온산에 가득한 이때에”) 사랑을 나누시면 어떻겠어요? 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화담선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대자연에 비유할 정도로 컸던 것이 황진이의 마음이었다고 생각되는 명구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