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황금들녘? 붉은들녘, 검은들녘

추석을 앞두고 경기도 고양 ‘우보농장’에서는 벼 베기와 탈곡으로 정신 없었다. 차례상에 그 해 첫 수확한 햅쌀밥을 조상께 올리려는 이들의 주문이 몰리면서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추석을 앞두고 경기도 고양 ‘우보농장’에서는 벼 베기와 탈곡으로 정신 없었다. 차례상에 그 해 첫 수확한 햅쌀밥을 조상께 올리려는 이들의 주문이 몰리면서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추석을 일주일여 앞둔 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우보농장’에서는 벼 베기와 탈곡이 한창이었다. 이근이(53) 우보농장 대표는 “추석 차례상에 햅쌀밥을 올리고 싶다는 주문이 밀려들어 정신없다”고 했지만 기분 좋아 보였다. 기록적인 폭우와 장마, 연이은 태풍을 꿋꿋하게 버텨내고 알곡을 맺어준 벼에 감사하는 듯 보였다.

우보농장에서 지금 수확하는 건 ‘올벼’라 할 수 있다. 올벼란 일찍 익어서 추석 전 추수하는 조생종 벼를 말한다. 과거 추석에는 그해 첫 수확한 햅쌀로 술과 떡을 빚어 조상께 올리기 위해 올벼를 따로 심었다. 옛날에는 송편을 추석에만 먹지 않았기 때문에 추석에 먹는 송편은 ‘오려송편’이라 했다. 올벼의 옛말인 ‘오려’가 송편 앞에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방방곡곡 마을마다 달랐던 토종벼 1500여 종

가을 수확철 논은 거대한 황금빛 물결이다. 하지만 4000여 평 우보농장의 논은 ‘황금 들녘’이 아니었다. 여러 색깔과 크기의 헝겊을 기워 만드는 조각보처럼 이곳저곳 색깔이 달랐다. 일반적인 황금빛에서부터 붉은색, 갈색, 얼룩 무늬, 심지어 새까만 검정까지 다양한 색깔의 벼가 바람에 출렁거렸다. 이근이 대표는 “우리 토종벼는 색도 크기도 맛도 지역마다 다르다”고 했다.

“저기 끝에 심어져 있는 검정 낱알 달린 벼가 평안도에서 재배하던 ‘북흑조’입니다. 북흑조를 키운 평안도 사람들은 추수철 검은 들녘을 봤을 거예요. ‘자광도’를 재배한 김포 농부들은 붉은 들녘을 봤을 거고요. 토종벼를 키우면서 추수철 황금 들녘이 잘못된 표현임을 알았습니다. 1500여 종이 자랐던 옛날엔 마을마다 가을 들녘 풍경의 색이 달랐을 겁니다.”

구한말까지 한반도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쌀이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일본이 실시한 한반도 전역의 벼 품종 조사에 따르면 그때까지 토종벼가 1451종(種)이나 존재했다. 그야말로 방방곡곡 마을마다 그 토양과 기후에 최적화된 지역별 토종벼가 있었다.

일본은 수확을 늘려 더 많은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해 벼 품종을 개량·통일화했다. 이때 토종벼가 한 번 사라졌다. 해방이 되고 최근까지 정부의 쌀 정책은 1970년대 쌀 자급자족을 위해 통일벼를 개발한 것처럼 생산량에 맞춰져 있었다. 다시 한번 토종벼가 사라졌다. 이 대표는 “사실상 토종벼의 99.9%가 사라진 것”이라고 했다. “국립유전자원센터에서 보존하고 있는 토종벼 볍씨가 450종 정도 됩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토종벼의 전부지요. 1980년대 들어 다품종화로 농업 정책이 다시 바뀌었지만 지금 팔리는 쌀은 대개 일본 품종을 개량한 것들입니다.”

수확을 앞둔 경기도 고양 '우보농장' 논은 황금 들녘이 아니다. 황금빛부터 빨강, 갈색, 검정까지 조각보처럼 알록달록하다. 토종벼는 색도 크기도 맛도 지역마다 달랐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수확을 앞둔 경기도 고양 ‘우보농장’ 논은 황금 들녘이 아니다. 황금빛부터 빨강, 갈색, 검정까지 조각보처럼 알록달록하다. 토종벼는 색도 크기도 맛도 지역마다 달랐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청와대 트럼프 만찬에 오른 토종쌀

토종벼를 키우는 농부는 이근이 대표를 비롯해 전국에 30여 명에 불과하다. 시골 출신이지만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이 대표가 농사를 처음 접한 건 2000년 경기도 과천에 살 때 아내가 주말농장에 작은 땅을 분양받으면서다. 일산으로 이사하고 아내가 다시 주말농장에 등록해 10평쯤 되는 땅을 얻었다. 기독교계 수도원 동광원(東光園) 벽제분원에서 운영하던 주말농장이었다. “동광원 할머니들이 농사짓는 걸 보고 ‘아 이게 진짜 농사구나’ 싶었습니다. 똥과 음식물 찌꺼기로 거름을 만들고, 씨앗도 사서 쓰지 않고 수확한 작물에서 얻은 걸 다음 해 다시 심더군요.”

그는 농사에 푹 빠졌고, 주말농장 땅을 차츰 늘렸다. 토종벼 농사는 2010년 우보농장을 세우고 이듬해인 2011년부터.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얻은 토종 볍씨 30여 종이 있었다. 품종별로 10~20알밖에 없는 볍씨를 3평짜리 논에 심었다. 3000평 논에 심을 수 있는 양을 수확했다. “그제야 급히 논을 수소문했지요. 여기 우보농장 2000여 평에다가 인근 논들을 합쳐 4000여 평을 마련했습니다.”

올해 이 대표는 토종벼 250여 종을 심었다. 추석 전에는 ‘대궐찰’, ‘늘벼’, ‘서산조’, ‘밑다래’, ‘아가벼’ 등 조생종을 수확한다. 추석 이후로는 11월 말까지 평안남도에서 재배하던 북흑조, 잎이 붉은색을 띠는 ‘붉은차나락’, 족제비 꼬리를 꼭 닮은 ‘족제비찰’, 얼룩덜룩한 색과 모양이 영락없는 까투리 꼬리인 ‘까투리찰’ 등을 익는 순서대로 수확하게 된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기념으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는 4가지 코스 요리 중 주요리로 360년 씨간장으로 양념한 한우 갈비구이와 토종쌀 ‘북흑조’ ‘흑갱’ ‘자광도’ ‘충북흑미’ 4종으로 지은 돌솥밥이 상에 올랐다. 이 돌솥밥에 들어간 토종쌀을 이 대표가 제공했다. 청와대는 이남의 쌀 자광도·충북흑미와 이북의 쌀 북흑조·흑갱을 섞어 지은 밥으로 남북 화해와 통일의 염원을 담으려 했던 듯하다.

토종쌀 되살리면 한식 더 풍성해져

까만 빛깔이 독특한 ‘북흑조’. 평안도에서 재배하던 토종 벼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까만 빛깔이 독특한 ‘북흑조’. 평안도에서 재배하던 토종 벼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북흑조는 토종벼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마디가 튼실하게 이어져 있다. “북흑조 쌀로 지은 밥은 향이 구수하고 씹을수록 단맛과 감칠맛이 납니다. 현미색 또는 진녹색이라 흰쌀과 같이 밥을 지으면 보기 좋지요.” 흑갱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토종쌀. 겨는 검은색이지만 벗기면 흰 쌀알이 나온다. 키가 90㎝ 내외로 작아 잘 쓰러지지 않는다. 찰기와 끈기가 강하고 특유의 향이 있다.

자광도는 조선 인조 때 중국 지린성에 사신으로 갔던 이가 가져와 경기 김포에서 재배하는 품종이다. “안토시아닌 함량이 높아 끈기는 없지만 구수한 밥맛 덕에 궁궐에 진상되던 쌀입니다. 서양 요리사들은 스페인 전통 쌀 요리 파에야(paella)에 어울린다고들 해요.” 충북흑미는 겨를 벗겨내면 검은 쌀알이 나온다. 토종벼 중에는 거의 없는 흑미(黑米)다.

이 밖에 ‘자치나’는 차져서 쫀득하게 씹는 맛이 좋고, ‘백경조’는 개량종 쌀과 맛이 비슷하지만 식어도 향과 찰기와 윤기를 잘 유지하며, ‘강릉도’는 찰기가 많아서 떡을 만들어 먹기 알맞다.

이근이 대표가 토종쌀 되살리기에 힘쓰는 건 토종쌀이 개량종보다 맛있거나 우수해서는 아니라고 했다. “맛의 선호도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니 토종쌀이 더 맛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옛날 쌀 품종이 1500여 개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 얼마나 쌀 맛이 단조로워졌는지 알 수 있죠. 다양한 맛과 색의 토종쌀 재배가 늘면 떡, 막걸리 등 쌀을 바탕으로 한 음식 문화가 더 풍요로워질 겁니다. 조선시대에는 12만 개의 주막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역마다 다른 쌀로 막걸리를 담갔으니, 그 맛이 얼마나 다채로웠겠어요.”

“유전자원센터에 있는 토종벼를 모두 심어보는 게 목표”라는 이 대표는 “올해는 150가지 쌀 맛을 볼 수 있을 듯하다”고 했다. 어떤 밥맛일지 기대된다. 마을마다 서로 다른 밥 냄새가 피어올랐을 옛 추석은 어땠을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