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잡고 병나발을? “슬기로운 소주생활 알려드립니다”



소주를 잔에 따르며 활짝 웃는 김완준씨. 김씨는 ‘소주 아티스트’지만 그의 아내는 소주를 한 잔도 못 마신다. 그는 “소주로 책까지 쓰니 소주가 지긋지긋하다던 아내가 이젠 대단하다고 감탄한다”며 웃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쓰디쓴 이 소주가 술잔에 넘치면 손톱 밑에 낀 때가 촉촉해, 빨간 내 오른쪽 뺨에 이제야 비가 오네….’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영화 ‘기생충’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 ‘소주 한 잔’이다. 가난한 반지하 가족의 장남 기태(최우식)의 한숨이 담긴 이 가사는 봉준호 감독이 썼다. 봉 감독은 “사람이 온갖 감정을 느끼게 될 때면 혼자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라고 했다.

직장인 김완준씨도 그랬다. 나이 48세, 주력 30년, 주량 소주 2병. 평범해 보이는 주당(酒黨)이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8년 동안 소주에 천착하며 자신의 ‘부캐(부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부캐는 ‘소주아티스트 퍼니준’. 소주하고도, 예술하고도 전혀 관련 없는 회사에 다닌다는 김씨를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만났다. 50년도 넘은 집을 뜯어고친 이곳은 김씨의 집이기도, 퍼니준의 갤러리이기도 하다. 집 곳곳엔 초록색 소주병을 이용한 업사이클링 작품이 있었다. 노트북 세 대를 켜놓고 작업 중이던 책상 위엔 그가 8년간 집필한 책 ‘알랑말랑 소주 탐구생활’ 원고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최근 출간된 이 책은 세계 최초 ‘소주 마시기 가이드북’이다.

‘소주 마시는 법’을 아시나요

-’소주아티스트’란 말이 생소하다.

“30년 가까이 소주를 마셨다. 20대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마셨고, 30~40대 때는 소주가 인생길의 친구가 됐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주가 내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내 안의 예술적 자아는 소주로부터 늘 영감을 받아왔다는 것을, 내게 소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공감과 소통의 도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소주에 대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무도 ‘소주 마시는 법’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소주 마시는 법’이 따로 있나.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는 법과 관련한 책은 참 많다. ‘이 술은 어떻게 마셔야 한다’고 설명해주는 바(bar)도 많다. 그런데 소주 마시는 법을 알려주는 곳은 없더라. ‘세계인이 사랑하는 한국의 소주가 이렇게 천대받아도 되는 건가’란 생각이 들었다.” 영국 주류 전문매체 드링크인터내셔널은 최근 하이트진로의 소주가 20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 브랜드라고 발표했다. 지난해 하이트진로 소주 세계 판매량은 23억8250만병이다.

“한 번은 소주 병목을 잡고 나발을 부는 외국인을 본 적이 있다. 소주 마시는 법, ‘주도(酒道)’를 배우지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거다. 한국인들도 술자리에서 알음알음, 눈치로 주도를 배우다 보니 중구난방이다. 30년 소주 애호가로서 나름의 사명감을 갖게 됐다.”

-그래서 어떻게 마셔야 하나.

“흔히 말하는 저잣거리 이야기를 모아 주도를 정리했다. 주도는 10단계다. 술자리 착석부터 시작해서 소주병을 잡고, 병을 따고, 소주를 권하고, 따르고, 잔을 잡고, 소주를 받고, 건배하고, 마시고, 잔을 놓기까지. 너무 복잡한가?(웃음) 소주는 서서 마시는 술이 아니고, 자작이 아닌 수작(酬酌)해야 하는 술이다. 소주를 따를 때 소주병은 오른손으로 쥐고 왼손은 펴서 병을 가볍게 받친 뒤 따라야 한다. 친한 사이면 오른손만 써서 따라도 된다. 하지만 왼손으로 쥐고 따르는 것은 결례다. 소주를 받을 땐 오른손은 소주잔을 쥐고 왼손을 펴서 오른손날과 소주잔 아랫부분에 가볍게 댄 상태로 받아야 한다. 한복 소매의 아랫부분에 술이 닿을 수 있어 이런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또 소주잔은 깊이가 얕아 술이 쉽게 넘치기 때문에, 술을 받을 때 잔을 기울이지 않는다. 술을 따르는 상대방에게 술이 어느 정도 찼는지 보여주는 배려 차원에서 살짝만 기울이는 게 좋다.”

퍼니준은 지난해 포털사이트 콘텐츠 플랫폼에서 소주에 관한 글을 연재했다. 조회수가 100만회를 넘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댓글창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참 쓸데없는 정보군요’란 반응과 ‘저런 정보도 없이 술 마시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사회 초년생들한테 좋은 정보입니다’란 반응이 동시에 나왔다.

-젊은 사람들은 ‘꼰대’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하, 맞다. 실제로 ‘꼰대 추가요’ ‘뭔 개소리를 정성껏 풀어놨냐’란 댓글이 달렸다. 소주는 싸구려 술인데 멸치대가리만 있으면 되지, 왜 귀찮게 이것저것 알아야 하냐는 거다. 반면 ‘사회 나가면 배워야 하는 일이다’ ‘몰라서 곤혹스러웠던 적 많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외국인들에게도 소주 교육은 필수다.”

가장 맛있게 소주를 마시는 방법

-소주는 어떻게 마셔야 가장 맛있나.

“적당히 마셔야 가장 맛있다. 너무 싱겁나?(웃음) 대학생 때 술 마시고 길에서 잔 적이 많다. 그때는 소주를 많이 마시는 게 멋있는 거였다. 소주 8병을 마셨다는 전설의 여학생이 추앙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위험하다. 마실 땐 좋았는데 다음 날 후회한다면 맛있는 게 아니다.” 퍼니준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법화경의 경구를 읊었다. 술을 무분별하게 마시면 결국 술이 사람을 망친다는 뜻.

-적당히 마신다는 전제하에 맛있게 마시는 팁을 준다면.

“온도가 중요하다. 2003년 보해양조가 잎새주에 온도감지센서를 붙여서 판매했다. 가장 맛있는 온도인 7도가 되면 잎새주 상표에 있는 5개의 잎새 중 1개가 빨갛게 변하게 했다. 하이트진로의 참이슬도 10도 이하가 되면 라벨의 두꺼비 그림이 파란색으로 변하게 했다. 8~10도가 시원하면서도 술맛을 음미하기 좋은 온도다. 그리고 소주는 같이 먹는 음식과 어우러지면서 음식의 맛을 배가시키는 데 특화된 술이다. 여론조사상 한국인 최고의 소주 안주는 삼겹살이다. 동의한다.”

-한국 사람들은 소맥을 많이 먹는다.

“한국인들은 섞어 마시는 걸 좋아한다. 1837년에 쓰인 걸로 알려진 책 ‘양주방’에 막걸리에 소주를 섞는 ‘혼돈주’ 제조 비법이 담겨 있을 정도로 유서 깊다. 가장 대중적인 소주 칵테일이 소맥이다. 맥주잔에 소주를 조금, 맥주를 많이 타는 게 일반적인데, 비율은 개인 취향에 달렸다. 소맥 중에 꿀주를 추천한다. 꿀주는 소주잔에 소주를 80% 먼저 따르고, 20%를 맥주로 채우는 소맥이다. 첫맛은 탄산이 느껴지는 맥주맛, 끝맛은 달달한 소주맛이다. 원샷으로 마셔야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최근 고급 소주들이 인기인데.

“해외 시장을 겨냥한 소주들이 많다. 긍정적으로 본다. 그런데 그런 소주들이 고급스러운 클래식이라면, 초록병 소주는 대중적인 K팝이랄까. 다르다.”

-소주에 대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팔꿈치로 병의 바닥을 치는 이유를 아는지? 옛날 소주 병뚜껑은 코르크였다. 코르크 부스러기가 가라앉아 있으니까 (부스러기를) 위로 올리려고 친 거다. 그다음에 뚜껑을 열고 병목을 탁탁 치면 부스러기가 바깥으로 튀어나간다. 요새는 그냥 습관처럼, 술자리 분위기를 띄우려고 바닥을 때린다.”

-해장 비법이 있나.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땀을 뻘뻘 흘린다. 몸에서 땀을 내면 확실히 가뿐해지는 느낌이 있다. 해장술이라고 해서 술 마신 다음 날 아침 식사 때 국물과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시적인 진통 효과가 있을 뿐 건강에는 몹시 해롭다. 애용하는 숙취해소제는 여명808이고, 배음료도 즐겨 마신다.”

-술자리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술을 잘 못 마시거나 마시면 안 되는데 마셔야 하는 상황이 아직도 많지만, 요새는 못 마시면 못 마신다고 얘기하는 게 최고다.”

-소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코로나가 끝나면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소주 원데이 클래스’를 열고 싶다.”

퍼니준은 지난달 17일부터 서울 청계산입구역 복합문화공간 헬시아뜰리에 아몬드에서 ‘건강한 소주생활’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소주에 관한 그의 책과 그림을 전시한다. 그는 꿈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딸이 성인이 되면 주도를 정확히 알려주고, 이런저런 얘기 나누며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다.” 열한 살 딸은 지난 어버이날 A4용지 6장짜리 그림책을 만들어 아빠에게 선물했다. 책 제목이 ‘참이슬’. 아빠의 지독한 소주 사랑을 그렸다. 인터뷰가 끝나자 김완준씨가 웃으며 말했다. “소주 한잔하실래요?”

펌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9/04/ZSBWWUU3DNFFRA7SWO4YBKIT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