葛 處士(갈 처사)는 누구?

갈 처사 西五陵(서오릉)

아~ 갈처사(葛處士)가 그립고나!
개코도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숙종대왕이 어느 날 미행 중 수원성 고개 아랫쪽 냇가를 지나는 데, 허름한시골총각
이 관을 옆에 놓고 슬피 울면서 물이 나오는 냇가에다가 묘자리를
파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리 가난하고 몰라도 유분수지 어찌하여 묘를 물이 나는 곳에 쓰려고 하는지 이상하다‘ 생각을 하고, 필시 무슨 연고가
있지 싶어서 그 총각
에게로 다가가….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의 것인가? 하고 물었다.

“제 어머님의 관 입니다.”

“그런데 개울은 왜 파는 고?” 하고 짐짓 알면서도 딴청을 하고 물으니….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합니다.”

미루어 짐작했지만 숙종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하여 여기에다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하고
재차 다그쳐 물으니….

그 총각은 “저도 영문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葛處士)라는 노인이 찾아와 불쌍하다면서 저를 이리로 데리고 와 이 자리
에 꼭 묘를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라고, 힘 없이 대답 하고는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양반나리
에게 하소연하듯늘어놓았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葛處士)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지켜보고 있을테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 했지, 이번에는 웬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총각은 지체없이 빠른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갔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하질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상감마마를 생각하니, 황송
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괘씸한
갈처사(葛處士)라는 자를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대로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가보니 산마루에 있는찌그러져가는
갈처사(葛處士)의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노인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葛處士)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아오셨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을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키나 한 말이요? 골탕을 먹이는것도 유분수
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숙종의 참았던 감정이 어느새 격해져
목소리가 커졌다.
갈처사(葛處士) 또한 촌노이지만 낯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 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속으로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임금 앞에서….,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삼백 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發福)을 받는 자리
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 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葛處士)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삼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葛處士)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졌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않고 왜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을 일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을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 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나랏님이 찾아 올 자리여~! 지금은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매고 있는것 같았다.

“그렇다면 임금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을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며 방 귀퉁이에 있는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 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와 변복한 임금님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님을 알아 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葛處士), 괜찮소~^^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상감마마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葛處士)가 잡아준 숙종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 서오능에 자리한 명릉(‘明陵’)이다.

그 후 숙종은
갈처사(葛處士)에게 3천 냥을 하사하였으나,
갈처사(葛處士)는 노자돈으로 삼십 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가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교훈.

이럴 때 갈처사(葛處士)가 홀연히 나타나 나라의 앞날이 확 열리는 묘자리 몇개를 지정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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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처사는 風水地理(풍수지리)에 能(능)한 神人(신인)으로 山中 隱君子(산중 은군자)이다. 肅宗大王(숙종대왕)의 陵(능)을 잡아준 明師(명사)이다. 숙종대왕의 능은 서오릉에 있다. 西五陵(서오릉)은 예종과 예종의 비, 그리고 숙종과 숙종비 등의 五陵(오릉)을 이름한다.

즉 창릉, 익릉, 쌍릉, 단릉, 홍릉 등을 말하고 경기도 덕양구 용두동에 있으며 이 五陵(오릉) 가운데에 한 곳이 숙종대왕의 릉인데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서오릉 이란 慶福宮(경복궁)에서 서쪽에 있는 다섯 릉이라는 뜻이다.

숙종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卽位(즉위) 했음에도 垂簾聽政(수렴청정) 없이 直接 王業(직접 왕업)을 遂行(수행)한 英明(영명)한 才人(재인)으로 風水地理(풍수지리)에도 能(능)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숙종대왕과 갈 처사의 因緣(인연)이 示唆(시사)하는 바는

첫째 조선 27왕 중에 몇명 안되는 大王 稱號(대왕 칭호)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廣開土大王 以後(광개토 대왕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世宗大王(세종대왕)을 비롯하여 端宗大王(단종대왕), 正祖大王(정조대왕) 등으로 이어오면서 高宗皇帝 稱號(고종황제 칭호)가 생겨 났으니 將次 大王(장차 대왕)보다 上位(상위)인 皇帝(황제)가 이 땅에서 出現(출현) 하게 된다는 상징이다.

둘째 王號(왕호)가 숙종인 까닭을 考察(고찰)해 보자. 엄숙할 肅(숙) 자는 결실의 가을철 肅殺之氣(숙살지기)를 뜻한다. 改革(개혁)을 상징한다.

셋째 13세의 어린시절부터 왕위에 올라 長期間 賢明(장기간 현명)하게 王位(왕위)를 維持(유지) 하였다는 점이다. 十三數(십삼수)는 天子降臨(천자강림)의 象徵數(상징수)이다. 周易(주역)의 天火同人(천화동인)의 卦象(괘상)으로 后天到來 象數(후천도래 상수)이다. 그는 政策(정책)의 이름에서 大同法(대동법)을 施行(시행)하였다.

넷째 風水地理(풍수지리)에 一家見(일가견)이 있었다는 점이다. 갈 처사와의 전설 같은 神話(신화)는 神人合一時代(신인합일시대)를 알게 한다. 장차 眞人(진인)의 모습으로 처음에는 隱子(은자)로서 地理(지리)에 能(능)한 人事(인사)라는 啓示(계시)이다.

道脈(도맥)을 繼承(계승)하는 天地公事(천지공사)에서 吳 樹葉(오 수엽)이 群山 往來後(군산 왕래후)에 山相家(산상가)가 된 高 判禮 首婦(고 판례 수부)의 后天 陰道 道脈公事(후천 음도 도맥공사)와 聯關(연관)이 있다.

다섯째 장 희빈과의 愛情行脚(애정행각)이다. 張氏(장씨)의 族譜(족보)를 보면 仁同 張氏(인동 장씨)로 하여 木川 張氏(목천 장씨) 등의 系譜(계보)가 있다. 인동은 慶尙北道 龜尾(경상북도 구미)의 이웃 땅이고 木川(목천)은 忠淸南道 天安(충청남도 천안)의 이웃 땅이다. 글자로 보면 활 弓(궁) 자에 어른 장(긴 장) 자로 베푼다는 뜻을 가진다. 도맥을 잇는 나그네가 張氏(장씨)와 緣(연)을 맺는 관계이다.

여섯째 19대 왕으로 바둑판 도수라는 점이다. 또한 엄숙할 肅(숙) 자 왕호와 無關(무관)하지 않다. 回文山 五仙圍碁 明堂(회문산 오선위기 명당)의 是非心判(시비심판) 뜻과 연결된다.

일곱째 換局政治(환국정치)로 王權(왕권)을 强化(강화) 했다. 換局(환국)이란 政局(정국)을 變換(변환)시켜 忠誠(충성)을 誘導(유도)했다는 것이다.

執權黨(집권당)이 너무 강해지면 反對(반대)의 相對黨(상대당)을 利用(이용)하여 정국을 변환시키는 정책이다. 名分的(명분적)으로는 黨派(당파)싸움의 정국을 蕩平策(탕평책)이란 이름하에 서로 다른 당의 인물을 登龍(등용)시키는 정치로 이끌었던 것이다.

亂世(난세)의 권모술수 보다는 明堂(명당)의 지기를 통하여 자연도법이 필요한 정사를 읽을 수 있는 난세의 운수를 통해 혁신을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라, 숨은 은자인 갈처사와 숙종대왕의 설화에 주목할 때이다.

符應經(부응경)에 영신당주께서 數次(수차) 갈처사를 거명하신 바를 理解(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목우당 부응경 163쪽 위에서 9째 줄의 經句(경구)이다.

‘葛處士(갈처사)의 道德兮(도덕혜)여, 治天下之 大經大法 詩書窮理 十字(치천하지 대경대법 시서궁리 십자)로다.ᆢᆢ 十字天地 無形外(십자천지 무형외)로다.’

위 글에서 十字天地無形外(십자천지 무형외)란 陰陽 天地合德(음양 천지합덕)의 후천세계는 물질인 財物(재물)에 있지 아니하고 無形(무형)의 精神世界 次元(정신세계 차원)에 있다는 뜻이다.

또 申 在孝(신 재효)가 지었다는 갈 처사 十步歌(십보가)를 뜻한다. 걸음마다의 十數(십수)로 지은 四字成語 文章(사자성어 문장)이다.

一步(일보)는 一治一亂(일지일란), 一盛一衰(일성일쇠),

二步(이보)는 二姓之合(이성지합), 二君不事(이군불사), 二夫不敬(이부불경),

三步(삼보)는 三綱五倫(삼강오륜), 三台六卿(삼태육경), 三十六計(삼십육계),

四步(사보)는 四方列强(사방열강), 四顧無親(사고무친), 四面春風(사면춘풍),

五步(오보)는 五十土空(오십토공), 五常無常(오상무상), 五臟無臟(오장무장).

六步(육보)는 六出奇計(육출기계), 六伐奇山(육벌기산), 六韜三略(육도삼략),

七步(칠보)는 七星獻誠(칠성헌성), 七國爭雄(칠국쟁웅), 七從七擒(칠종칠금),

八步(팔보)는 八字恨歎(팔자한탄), 八方商賈(팔방상가), 八道江山(팔도강산),

九步(구보)는 九次莫甚(구차막심), 九遷痛哭(구천통곡), 九曲寃傷(구곡원상).

十步(십보)는 十字路 彷徨(십자로 방황), 十年長病(십년장병), 十年求山(십년구산),

위 글에서 俗世(속세)의 虛無(허무)와 道 家(도가)의 精神(정신) 두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인의 속세적인 삶과 도인의 초연한 모습을 헤아리게 한다.

四面春風(사면춘풍)은 후천 봄 바람이요, 선천 무상한 삶을 버리고 五十土空(오십토공)으로 七星獻誠(칠성헌성)하여 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십토공이란 천지의 중심은 五(오)로 戌五空(술오공)자리에 있는 中心(중심)의 人材(인재)를 따라 修行(수행)하라는 뜻이다.

‘無識 無識 無識(무식 무식 무식)이다. 無識以後(무식이후)에 有識(유식)이라. 有識男子 血食君子 知之者(유식남자 혈식군자 지지자)는 己知(기지)로다 ᆢ ᆢ’

갈처사의 도덕이란 가난한 집안 총각의 모친 초상을 임금님을 통해 국록의 쌀 300가마를 마련하여 吉地(길지)에 葬事(장사) 지내주게 하는 政治(정치)요, 숙종의 능자리를 잡아 國葬(국장)을 치르게한 후에 받은 3000냥은 反納(반납)하고 30냥 旅費(여비)만 받아 홀로 유유히 사라졌다는 갈처사의 道德心(도덕심)을 뜻한다. 갈처사란 칡넝쿨의 산중 움막에 隱居(은거)한 處師(처사)를 의미한다.

大經大法 詩書窮理 十字(대경대법 시서궁리 십자)란 산중의 오지에 숨어 천하를 완전한 세상으로 경영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말하고, 無識以後(무식이후)에 有識(유식)이란 無識道通 以後(무식도통 이후)에 有識(유식)한 后天 神人合一時代(후천 신인합일시대)가 到來(도래)한다는 뜻이다.

갈처사 같이 無識(무식)한 듯 하지만 難關(난관)에 처한 빈천자 백성에게 영명한 임금의 역량으로 백성을 통치를 할 수 있게 神道(신도)로써 誘導(유도)한 實話(실화)를 예로 든 것임을 알 수 있다. 神道(신도)를 통한 隱君子(은군자)가 主人(주인)이 되는 그 시절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갈처사가 사라진 후 언제부터인가 시속에 詩(시) 한 수가 유행했다는데

神妙(신묘)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 마루 언덕에 草幕(초막)을 지으니

陰宅明堂(음택 명당)은 냇가에 있고

陽宅明堂(양택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號痛(호통)치면서도 罪(죄)가 되지 않으니

風水(풍수)의 造化(조화)는 國法(국법)을 넘어가네.

볼폼 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積善(적선)하고

나랏님께 忠誠(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 길이 남으리라.

[출처] #3034 나는 누구인가? – 葛 處士(갈 처사)는 누구? Who is the Gal Cheosa?|작성자 해인1691 HAE IN 1691